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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의 문화

보령의 문화 글의 상세내용
제목 청라면
구분 지명유래
내용 靑 蘿 面 (청라면)

本面(본면)은 古百濟新村縣(고백제신촌현)에 屬(속)하였고 그후 新羅(신라)가 百濟(백제)를 統一(통일))한 후 熊川(웅천)(公州(공주)) 潔城縣(결성현) 新邑(신읍)이라 부르다가 그후 高麗時代(고려시대)에 이르러 河南道保寧縣(하남도보령현)에 屬(속)하였으며 또한 運州(운주)(洪州(홍주))에도 屬(속)하였었다.

朝鮮時代(조선시대)에 高灣(고려)(周浦(주포))에 첨사진을 設置(설치)한 后(후) 수사영으로 되어 이 영 관할에 屬(속)하였고 太宗(태종) 13年, 高宗(고종) 32年에 保寧縣(보령현) 保寧郡(보령군)에 編入(편입)되어 西紀(서기)1914年 面制改革(면제개혁)에 의하여 吾三田面(오삼전면)과 靑蘿面(청라면)이 統合(통합) 靑羅面(청라면)이라 稱(칭)하게 되었다. 地勢(지세)는 북쪽에 烏棲山(오서산) 東南(동남)쪽에 聖住山(성주산), 동쪽에는 白月山(백월산), 서쪽에는 五峰山(오봉산)으로 둘러있어서 盆地(분지)가 되어있고 칙과 당대미가 많았으므로 靑蘿面(청라면)이라 하며 現在(현재)는 11個里(개리) 20個區域(개구역) 蘿院里(나원리)(遠遇上中(원우상중)), 昭陽里(소양리)(丁山(정산), 屯垈(둔대)), 內峴里(내현리)(常內白峴(상내백현)), 蟻坪里(의평리)(元蟻(원의), 坪亭(평정), 鑛山村(광산촌)), 香泉里(향천리), 長山里(장산리)(長谷(장곡), 墻門(장문)), 玉溪里(옥계리)(貞洞西村(정동서촌)), 黃龍里(황룡리)(龍頭(용두), 松中(송중)), 長峴里(장현리)(長田嗚垈(장전오대)), 新山里(신산리) 및 奄峴里(엄현리)로 分割(분할)되어 管轄(관할)하고 있음.

69.89㎞의 面積(면적)과 1~2千餘名(천여명)의 人口(인구)가 살고 있다. 도 참설에는 內浦(내포)땅에 二代天子之地(이대천자지지)와 萬年榮華之地(만년영화지지)가 있다고 한다. 이중 북쪽에 있는 天子之地(천자지지)는 興宣大院君(홍선대원군)이 차지하고 남쪽에 있는 萬年榮華之地(만년영화지지)는 아직 主人(주인)이 안나타나고 있는데, 그 名堂(명당)이 바로 이곳이라는 설로 有名(유명)한 곳이 이 고장 靑蘿(청라)이다.

慾心(욕심)이 많았던 흥선대원군은 오서산을 나라에서 몽땅 차지해버려 그 후 묘도 못쓰게 했다고 한다. 이같은 연유때문인지는 몰라 청라지방에는 많은 兩班(양반)들이 落鄕(낙향) 士族(사족)이 많은 것이 特徵(특징)의 하나이다.

靑羅(청라)를 가리켜 三多鄕(삼다향)이라고 부르는데 兩班(양반)(班多(반다)), 돌(石多(석다)), 말이 많은 것(言多(언다)) 때문이라고 한다. 班多(반다)는 많은 人士(인사)가 배출되었고, 돌이 많은 것은 有名(유명)한 烏石(오석)이 이곳 인근에서 나오고 있음을 뜻하고, 言多는 지조가 굳은 선비들이 살았기 때문에 바른말(直言(직언))과 상소를 많이했기 때문이다.

烏棲之問可活萬人之地(서지문가활만인지지)의 터였던 이 곳에 살던 兩班(양반)들은 지금은 靑蘿貯水池(청라저수지)에 一部(일부)가 묻힌 창벽기슭에서 詩(시)를 짓는등 人生(인생)을 즐겼다. 지금도 창벽에는 玉溪(옥계)라는 글씨가 쓰여있는데 50餘年(여년)전에는 이곳의 선비들이 모여 詩(시)를 지음은 勿論(물론) 國論(국논)도 論議(논의)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청라면이 되었다.

蘿院里(라원리)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보령군(保寧郡)에 속했으며 조선말엽(朝鮮末葉)에 보령군(保寧郡) 청라면(靑蘿面)의 구역(區域)으로서 청라원(靑蘿院)이 있었으므로 청라원(靑蘿院) 또는 청라동(靑蘿洞)이라 하였는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원우리(院遇里), 은선동(隱仙洞), 상중리(上中里), 지천리(芝川里), 월치리(月峙里), 주평리(酒坪里), 정산리(丁山里) 各一部(각일부)를 병합하여 라원리(蘿院里)라 하였다.

늦은목고개

(다리틔) 동남(東南)쪽으로 고개가 있는데 이고개를 「늦은목」고개라고 부른다. 부여군(扶餘郡) 외산면(外山面)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가 길고 목이느리게 생겼다 해서 「늦은목」고개라고 부른다.

다 리 재

(다리틔) 동(東)쪽으로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 「다리재」,월티(月峙)라고 부른다. 산(山)높이 575m의 백월산(白月山)줄기에 자리한 고개다. 나원리(蘿院里)에서 청양군(靑陽郡) 사양면(斜陽面)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조선(朝鮮)때 김시습(金時習)이 한(恨)을 품고 넘었던 고개로 매월당(梅月堂)을 추모하는 노래가 숨어있는 고개다. 고개아래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도 고개 지명(地名)따라「다리틔」라고 부르고 또한 「월티」라고도 부른다.

달걀바위

(위익상) 북(北)쪽에 자리한 바위를「달걀바위」라고 부른다. 옛날 이조초엽(李朝初葉)에 자기를 해치려는 정객에게 덤비자니 속된 인간이 되는 것 같아서 산에 올라가 이 바위를 집어던지고 혼자서 울분을 달랜 바위라 한다. 장군의 손자국이 남아있는 바위로서 달걀처럼 생겼다해서「달걀바위」라고 부른다.

벙 박 골
(초골) 동(東)쪽에 자리한 골짜기를 「벙박골」이라고 부른다. 「부엉바위」가 있는 골짜기로 범(虎)이 살던 골짜기라 하여「범박골」이라고 부르던 것이 변해서「벙박골」이라고 부른다. 모양이 부엉이처럼 생긴「부엉바위」가 있다.

벼락바위

「원우」마을 냇가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벼락바위」라고 부른다. 옛날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왜병(倭兵)들이 마을을 노략질하고 이곳에서 목욕을 하고 있을 때 마을사람들이 산에서 우리를 도와달라고 기도를 하자 하늘에서 갑자기 천둥이 울리고 벼락이 치더니 산위 바위를 굴려서 아래에서 목욕을 하던 왜적들을 모두 죽였다한다. 그때 산에서 내려온 이 바위를 벼락바위라고 부른다.

장군놀이터

은선동(隱仙洞) 위쪽으로 자리한 바위를「장군놀이터」라고 부른다. 고려말엽(高麗末葉) 한 장수가 이곳에서 무술을 닦고 있었는데 고려(高麗)가 망하고 이성계(李成桂)가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왕(王)이라고 부를 때 이 소식에 접한 장수는 아무말은 없었으나 비웃는 웃음으로 크게 웃었다 한다. 이 소식이 이성계(李成桂)에게 알려지자 이성계(李成桂)는 그를 잡아서 죽이라고 함으로, 이곳을 다스리는 고을 나졸들이 그를 잡으러 왔을 때 단칼에 모두 죽여 없앴다 한다. 그리고 그후에도 살아서 그가 무술을 연마하던 곳인데 여기를 「장군놀이터」라고 부른다.

산의산골

「초골」동쪽너머에 있는 골짜기를「산의산골」이라고 부른다. 산속에 골짜기가 자리해 있다해서「산의산골」이라고 부른다.

산 제 당

「다리틔」남(南)쪽에 산제당(山祭堂)이 있다. 산제당(山祭堂) 제사 양식은 칠갑산(七甲山)의 제사형식과 같으며 천신(天神)과 산신(山神)에게 제사를 지낸다.

새 냇 골

「다리틔」동북(東北)쪽에 자리한 골짜기를「새냇골」이라고 부른다. 샘물이 있는 골짜기로 「새터거리」라고 부른다.

새터거리

「위익상」 동남(東南)쪽에 새로 된 마을을 「새터」라 부르고 「새터」앞 거리에 자리한 마을을 「새터거리」라고 부른다.

수 렁 들

「새터거리」서북(西北)쪽으로 들이 있는데 이 들을「수렁들」이라고 부른다. 수렁이 많은 들이라「수렁들」이라고 부르던 것이 변해서「수렁들」이라고 부른다. 「수렁들」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도 들의 지명(地名)따라 「수렁들」이라고 부르며 마을은 또한 「주평」,「주평리」라고 부른다.

원 마 루

은선동(隱仙洞) 북(北)쪽에 자리한 마을을 「원마루」라고 부른다. 조선(朝鮮)때 청라원(靑蘿院)이 있었던 자리라「원마루」라고 부른다. 「원모루」,「원우」,「원우리」라고도 부른다.

隱 仙 洞(은선동)

「위익상」남(南)쪽에 자리한 마을을「은선동」이라고 부른다. 마을 형국(形局)이 신선(神仙)이 숨은 것 같은 형국(形局)이라 하여 은선동(隱仙洞)이라고 부른다.

자 잣 골

「위익상」동(東)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자잣골」,「자자동」이라고 부른다. 마을뒤에 큰 재가 있어 재 아래에 자리한 마을이다.

집진바위

「늦은목고개」어귀에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집진바위」라고 부른다. 바위모양이 집처럼 생겼다해서 「집진바위」라고 부른다.

산바위와 山女(산녀)

한나라의 왕(王)이 정치를 잘 하면 누구나가 정치 이야기하기를 즐겼다 한다. 한나라의 왕(王)이 폭군(暴君)이면 백성들이 입을 다물고 정치이야기를 하지 않으니 그 후유증이 무섭다 한다.

옛날 우리나라 왕(王)이 정치를 아주 잘할 때 이야기라 한다. 지금의 충청남도 보령군(保寧郡) 청라면(靑蘿面) 나원리(蘿院里) (원유) 마을 뒷산에「산」이라고 부르는 산녀(山女)가 있었다. 그녀는 배운 것은 없었으나 듣는 이야기로는 왕(王)이 항시 백성들이 잘먹고 사는지 그것만 근심한다는 이야기를 몇번인가 듣고부터는 어디를 가나 자기가 왕(王)을 만나본 것처럼

「우리 임금님은 백성들이 잘 먹고 사나 그것만 걱정한대 .. 」

하고 말문을 열었다 한다. 또한 그녀의 집 뒷마당에 있는 고목(古木)나무에 밤마다 물을 떠다놓고

「우리 임금님 오래 오래 살게 하소서」

하고 빌기까지 하는 그녀였었다.

헌데 하루는 집앞으로 말탄 역졸들이 뛰어가고 선비들이 모이면 큰일났따고 걱정을 하기에 그녀가 알아봤더니 왕(왕)이 병세가 위독하다는 것이였다. 그녀는 우선 큰일났구나 생각하고는 마을 한 선비네 집에 가서 물어본 즉 사실임을 알고 그날부터 앞산 바위밑에 움막을 짓고, 날마다 목욕(목욕) 재개하고서 하늘에 계신 천신(천신)께 기도를 드리는 것이였다.

「천신님 천신님 우리나라 임금님이 병석에서 일어나도록 하여주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그녀는 몇번이고 이렇게 기도를 드렸고 움막을 지은 지도 닷새가 지났는데, 하루는 들려오는 소식에 왕(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아무도 없는 산중에서 더구나 바위틈 움막엔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그녀는 쓰러진지 몇일이나 흘렀을까 잔잔한 빗소리를 듣고 눈을 떴었다. 그때는 벌써 국장(국장)이 지난 뒤였다. 그녀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항시 고통속에서 하루 하루를 보냈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그녀가 마을에 내려가서 들은 즉 이번에는 왕비(왕비)가 병으로 누워 일어나지를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바위밑 움막으로 들어가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기도를 드린지 사흘째 되는 밤이었다. 기도를 드리다가 깜박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한 백발의 노인(노인)이 나타나

「잘 들어라 왕비(왕비)병을 치료하는 데에는 한가지 방법밖에 없느니라 네가 앉아있는 그 자리 아래에 흐르는 물을 왕비(왕비)에게 바치도록 하라」

하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산녀(산녀)는 꿈에서 깨어나서 병에다 물을 한병 담고서 그길로 한양(한양)길에 올랐다. 그녀는 얼마나 달려갔던지 사흘만에 한양(한양) 궁전(궁전)앞에 나타나서 궁전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문을 지키는 나졸(나졸)들은 그녀가 못들어가도록 막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나졸들에게 애원을 했다.

「나리양반 이것보세요 나는요 충청도 보령땅 산골에 사는 산녀인데유 아 이물을 왕비님이 마시면 병이 낳는다니께 그러네유. 나는 안들어가도 좋으니 이 물이나 전해줄수 없을까유」

며칠을 기다리다가 겨우 사정해서 물 한병을 들여보내고 허전하게 집으로 가는 길로 들어섰다. 한양에 가면 왕비도 만나고 자기가 가지고 간 물을 왕비가 마시고 병석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싶었던 그녀는 너무나 서운했다. 한양까지 단숨에 달려갈 때는 몸이 피곤하지 않았지만 내려올 때는 몸이 천근이나 되는 것처럼 무거웠다. 어느듯 옷을 빨아입지 않아서 자기 몸이 거지와 같았다. 그녀가 천안땅을 지나서 아래로 내려올때는 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홍주(홍주)땅을 지나올때는 금방 쓰러질 것 같았다. 그는 겨우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서 우선 바위아래 움막으로 들어가서 끙끙 앓는 것이었다.

조정에서 시골 한처녀가 가져왔다는 물을 마신 왕비(왕비)는 그 물을 마시고 이상하게도 병석에서 거뜬하게 일어났다. 상궁(상궁)들이나 궁중(궁중)에선 신기한 일이라고 기꺼워하며 그 믈울 가지고 온 처녀를 찾았으나 알 곳이 없었다. 그래서 온나라에 지방을 써부치도록 하고 그녀를 찾다가 겨우 수소문 끝에 그녀의 거처를 알아내어 그쪽으로 충청도의 고을 원님을 찾아갔으나 그때는 여독(여독)에 산녀(산녀)가 쓰러져 죽은 후였다. 여기까지 달려온 원님은 슬펐지만 그녀의 충성스런 이야기를 들을때마다 눈시울을 붉히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원님이 조정에 알리자 조정에서는 그녀의 장례를 성스럽게 지내게 하고 무덤을 만들어 명복을 빌었다 한다. 산녀(산녀)가 죽자 산녀가 기도드리던 바위는 파란 이끼로 덮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산바위」라 부르고 그녀의 성스러운 마음을 항시 자랑하곤 한다. 지금 이 바위는「원우」마을앞 밤나무단지 위에서 이곳 청라땅을 굽어보며 서있다.

陰安部落(음안부락)과 散髮(산발)바위

遠隅區(원우구) 앞산은 聖住山(성주산)으로 東西(동서)로 뻗어 앞을 가로막고 있으며 이 山中(산중)에 映甫炭鑛(영보탄광)이 있어 年産數十萬屯(연산수십만둔)에 이르는 炭(탄)을 生産(생산)하고 있으며 또한 山中(산중)턱에 암석이 우뚝솟아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 炭石(탄석)이 散髮(산발)한 女人像(여인상)같다고 한다. 그래서 名稱(명칭)도「산바위」또는「散髮(산발)바위」라 하는데 이 바위 앞 마을이「蔭安(음안)」이라 하는데 음안에서는 집을 지을 때 方向(방향)을「산바위」에 두어 지으면 그 집에 피해가 뒤따른다고 한다. 또한 이 마을의 號數(호수)는 10餘號(여호)인데 家長(가장)들이 먼저 死亡(사망)하는 例(예)가 많아서 과부가 比較的(비교적) 많다는 것이다. 이는 앞산의 바위가 우뚝서서 바라보고 있는 고로 이런 불화가 따르는 것이 아닌가 누구나 의아해하고 있다.

昭陽里(소양리)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朝鮮末葉)에는 보령군(保寧郡) 청라면(靑蘿面)의 지역(地域)인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소리동(昭理洞), 둔대리(屯垈里), 승티리(升峙里), 양지리(陽地里), 정산리(丁山里) 일부를 병합하여 소리(昭里)와 양지(陽地)의 이름을 따서 소양리(昭陽里)라 하였다.

屯 垈(둔대)

「소릿골」동북(東北)쪽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둔대」라고 부른다. 옛날에 나라의 군사가 주둔한 일이 있는 마을이라「屯垈(둔대)」,「屯垈里(둔대리)」라고 부른다.

山 祭 堂(산제당)

「양지편」뒤로 산제당(山祭堂)이 있다. 부근 마을사람들이 마을의 편안과 잡귀를 없애기 위해 산제(山祭)를 지내는 당(堂)이다.

소 릿 골

「둔디」서남(西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소릿골」이라고 부른다. 소양리(昭陽里)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솔이 무성했던 마을이라「솔골」이라 부르던 것이「소릿골」로 변하여 부른다.

스무고개

「양지편」동북(東北)쪽에서 청양군(靑陽郡) 화성면(化城面)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스무고개」라고 부른다. 이 고개에서는 예산(禮山)까지 40리(里) 장항(長項)까지 八十里(팔심리)가 되는 고개인데 다른 고개에 비해서 가장 높은 고개이다. 고개가 험해서 옛날에는 도적과 산적(山賊)이 우굴거리며 산을 넘어 다니는 행인(行人)을 괴롭혀서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을때는 장정들 20여명(餘名)씩 몰려서 넘었다하여 「스무고개」라고 부른다. 또한 고개 아래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도 스무고개 아래에 자리해 있으므로 고개 지명(地名)따라「스무고개」라고 부른다. 「입티」,「입재」,「입티리」라고도 부른다.

양 지 편

「소릿골」북쪽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양지편」이라고 부른다. 양지바른곳에 마을이 자리해 있다해서「양지편」이라고 부른다.

의 낭 (익낭)

라원리(蘿院里)와 소양리(昭陽里)에 걸쳐있는 마을이다. 마을지대가 아름다운 곳으로 뒷산이 丁字(정자)로 생겼다해서 「정산」,「의낭」이라고 부른다. 또 正三品通政大夫井公(정삼품통정대부정공) 齊成墓(제성묘)와 草堂一部(초당일부)가 남아있다.

말 바 위

「스무고개」에서 100m쯤 아래에 「말바위」라고 부르는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말을 묻었다는 말바위다. 조선(조선)때 광산김씨(광산김씨) 문중에서 무예가 익숙한 김씨(김씨) 한사람이 말을타고 한양(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던중「말바위」근처에서 다른 곳으로부터 과거를 보러가는 여러 장수들과 만났는데 그들은 만너서 내기를 하게 되었었다. 내기인 즉 장수들이 화살을 하늘에 대고 쏘아 올리면 그 화살이 떨어질 때 자기가 타고온 말이 입으로 받아야 한다는 내기였다. 다른 장수들은 모두 화살을 하늘에 쏘아올리고 잽싸게 받았는데 김씨(김씨)말만 화살을 못받았으므로 이대로 가다가는 과거에 실패할 것이라 생각하고 단 칼에 목을 쳐서 바위를 들치고 말을 묻었다 한다. 그래서「말바위」라 부른다.

內峴里(내현리)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조선(朝鮮)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朝鮮末葉)에 보령군(保寧郡) 청라면(靑蘿面)의 지역(地域)인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내곡리(內谷里), 당내리(堂內里), 원좌동(元佐洞), 白峴區域(백현구역)으로 되어있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청라면 내현리로 되었다.
行政區(행정구)가 堂內(당내), 白峴(백현) 二개區域(구역)으로 分離(분리)되어 現在(현재)까지 이른다.

당 안

「안골」서쪽으로 자리한 마을을「당안」이라고 부른다. 옛날 고려(高麗)때에 희귀한 나무인 아가위나무가 있어 마을에서는 이 나무를 당나무라 부르고 제를 지내기도 했었다. 그래서 잡귀의 침범없이 무사히 지냈다 하는데 당안에 있는 마을이라「당안」이라 불렀다 한다.

안 골

「당안」동(東)쪽 안 골짜기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안골」이라고 부른다. 골짜기 안에 자리한 마을이라「안골」,「내곡」,「내곡리」라고 부른다.

원 자 울

「당안」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원자울」이라고 부른다. 고개아래에 자리한 마을로「원자울」,「원좌」,「원좌동」이라고 부른다.

휘유고개

「원자울」서남(西南)쪽에 자리한 고개를「휘유고개」라고 부른다. 고개에서 백토(白土)가 나오는 고개이기도 하다. 지금으로부터 300년전에 한 장수가 바위돌을 운반하다가 이 고개에서 후유하고 쉬었다해서「후유고개」라 불렀는데 변해서「휘유고개」라 부른다. 「휘유고개」아래에 있는 마을도 고개 지명(地名)따라「후유고개」라 부른다. 흰 흙이 나온다해서 백현(白峴),「백현리」라고도 부른다.

蟻坪里(의평리)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말엽(朝鮮末葉)에는 보령군(保寧郡) 청라면(靑蘿面)의 지역(地域)인데 「개미벌」이라고 부르는 들에 마을이 이룩되었으므로「개미벌」,「갬발」또는 의평(蟻坪)이라 불렀는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세곡리(細谷里), 상동리(上東里), 호동(孤洞), 평정리(坪亭里) 일부를 병합하여 의평리(蟻坪里)라 하였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청라면 의평리로 되었다.

가 느 실

「새터」마을 서쪽으로 가늘은 골짜기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가느실」이라고 부른다. 세곡(細谷), 세곡리(細谷里)라고도 부르는데 가는 골짜기에 마을이 자리해 있다해서 그리 부른다.

개 미 벌

의평(蟻坪) 둘레에 있는 큰 들을「개미벌」이라고 부른다. 산중(山中)에 자리한 큰 들인데 고려(高麗)때 김성우(金成雨) 장군(將軍)이 군사를 장산리 북방에 매복시키고 침입하는 왜적(倭敵)들을 습격하여 섬멸했는데 개미들이 그 시체를 뜯어 먹으려고 사방(四方)에서 모여들어「개밋둑」을 이루웠다 한다.

버 듯 골

「별정자」남동(南東)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버듯골」이라고 부른다. 유곡(柳谷)이라고도 부르며 버드나무가 무성했던 마을이라 한다.

벌 정 자
「여술」서(西)쪽 벌판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벌정자」라고 부른다. 연안(延安)이씨(李氏)의 정자(亭子)가 옛날에 있었던 마을이라「벌정자」라고 부른다. 지금은 吉貯水池(길저수지)로 수몰되었으며 능 參奉(삼봉) 李鍾完先生(이종완선생)이 사시던 곳이다.

여 술

「갬발」서남(西南)쪽에 자리한 마을을「여술」이라고 부른다. 전에 여우가 살았던 들에 마을이 생겨서「여술」,호동(孤洞)이라고 부른다.

갬 발

「개미벌」에 자리한 마을을 들의 지명(地名)따라 「개미벌」「갬발」의평(蟻坪)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개미가 많아서「개미벌」이라 부르던 들에 생긴 마을이다. 「갬발」위에 자리한 마을을「위갬발」이라 부르고「갬발」아래에 자리한 마을은「아래갬발」이라고 부른다.

중 뜸

「위갬발」과「아래갬발」중간(中間)에 자리한 마을을「중뜸」이라고 부른다. 또한 중뜸 위쪽에 자리한 마을은「위중뜸」중뜸 아랫쪽에 자리한 마을은「아랫중뜸」이라고 부른다.

할매고개

「중뜸」에 자리한 고개다. 옛날 아들 하나 딸 둘을 주워다가 기른 한 여인이 자식들 구박에 헤메다가 죽은 고개라 「할매고개」라고 부른다.

香泉里(향천리)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朝鮮末葉)에는 보령군(保寧郡) 청라면(靑蘿面)의 지역(地域)인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에 따라 임천동(林泉洞), 분향리(芬香里), 창대리(蒼垈里), 증성리(甑城里), 만천리(晩川里), 평정리(坪亭里) 一部(일부)를 병합하여 분향(芬香)과 임천(林泉)의 이름을 따서 향천리(香泉里)라 하였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청라면 향천리로 되었다.

불 무 골

「시루성」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고려(고려)때 김성우(김성우) 장군(장군)이 이곳에서 군사를 훈련하고 병기를 만들어서 침입해 오는 왜적(왜적)을 갬밭들에서 섬멸하였다 한다. 무기를 만들던 대장간이 있었던 마을이라 한다. 만천(만천)이라고도 부른다.

시 루 성

창대(蒼垈) 북쪽으로 자리한 성(城)을 「시루성」이라고 부른다. 증성(甑城)마을 옆산의 돌더미가 시루처럼 생겼다 해서「시루성」이라고 부르며 산꼭대기에 흙으로 쌓은 성이 있는데 성둘레가 288m나 된다. 고려(高麗)때 이곳에서 군사를 훈련하고 伏兵이에서 복병을 시켰다가 침입하는 왜적(倭敵)을 갬벌에서 맞아 싸워서 섬멸하였다 한다.

갬 밭 들

향천리(香泉里)와 장산리(長山里)에 펼쳐지는 들을「갬밭들」이라고 부른다. 갬이 많이 있는 들이라「갬밭들」이라고 부르는데 고려(高麗)때 이곳까지 쳐들어온 왜적(倭敵)이 우리 군사들에게 섬멸당한 들이다. 왜적(倭敵)의 시체를 파먹느라고 개미가 떼를 지어 살든 들이라「개미들」이라 부르던 것이 변해서「갬밭들」이라고 부른다는 전설도 있다. 「시루성」아래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도 산성(山城)이름따라「시루성」이라고 부른다. 마을은「시루성」「증성」,「증성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香 泉 里(향천리)

분향(芬香)이 素地名(소지명)은 后麓(후록)에 꿰같봉과 冊床峯(책상봉)이 있고 東北間(동북간)에 擧神峯(거신봉)과 사기점골 바랑뱀이 논이 있고 入口(인구)에는 목탁봉이 있으며 시루봉이 있다. 風水地理說(풍수지리설)에 의하면 老僧禮佛(노승예불)이 있다고 한다.

임천동(林泉洞)의 素地名(소지명)은 後面(후면)에 장끼(雉)번덕이가 있고 六峯(육봉)골이 있으며 남으로 백재와 새암골이 있는데 傳說(전설)에 의하면 名士(명사) 백상의와 도선이가 聖住山(성주산)에 壯丹(장단)을 찾기 위하여 이곳에 이르러 절을 하였다 하여 배재라고도 한다. 서쪽에 수리재가 있고 구수골이 있다. 蒼垈后面(창대후면)에「姜家墓生(강가묘생)」이 있고 음산골 銃(총)덕이가 있으며 서에는 표수골, 달랑고개가 있다. 임천골 창터에 伏雉形(복치형)이 있다고 한다. 蒼垈(창대)는 金成雨將軍(김성우장군)이 倭敵(왜적)을 섬멸할 때 軍糧穀(군량곡)을 貯藏(저장)한 곳 이라고 한다. 시루성(甑城) 後面(후면)에 堂山(당산)이 있는 山祭堂(산제당)이 있고 여기가 城(성)터이다. 시루성 西北間(서북간)에 불무골이 있는데 지금은 人家(인가)도 없다. (水沒地(수몰지))

坪亭(평정)은 行政區域合倂時(행정구역합병시)에 蟻坪里(의평리)가 되었다. 버드골 柳谷(유곡)은 남쪽에 시면골이 있고 그形局(형국)이 사巢柳枝(소유지)라고 한다. 벌정자는 지금 靑川貯水池(청천저수지)가 되었다. 가느실(細谷(세곡))의 서쪽에 高靈申氏(고려신씨)의 烈女旌門(열녀정문)이 있고 동에는 홍반이가 있는데 細谷(세곡)에는 옥녀직금(王女織錦)名堂(명당)자리가 있다한다.

長山里(장산리)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해서 조선말엽(朝鮮末葉)엔보령군(保寧郡) 청라면(靑蘿面)의 지역(地域)인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상장동(上長洞), 하장동(下長洞), 서원리(書院里), 장내리(墻內里), 서산리(西山里), 복병리(伏兵里), 질곡리를 병합하여 장동(長洞)과 서산(西山)의 이름을 따서 장산리(長山里)라 하였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로 되었다.

담 안

「절골」남쪽에 자리한 마을을「담안」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큰 부자(富者)가 살면서 긴 담을 쌓았었는데 그 안쪽에 마을이 자리해 있다해서「담안」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靑川貯水池(청천저수지)로 因(인)해 大部分(대부분) 漫水(만수)되었다.

복 병 이

「서산밑」남(南)쪽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복병이」라고 부른다. 고려(高麗)때 김성우(金成雨)장군(將軍)이 이곳에다 복병(伏兵)을 매복시키고 침입하는 왜적(倭敵)을 맞아 크게 무찔렀다 한다. 우리 군사들이 숨어서 적이 찾아 들기를 기다렸던 곳에 마을이 생겼다 해서 복병(伏兵)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靑川貯水池(청천저수지)로 完全(완전) 漫水(만수)되어 없어졌다.

불 뭇 골

복병이(伏兵) 남(南)쪽에 자리한 마을을「불뭇골」이라고 부른다. 고려(高麗)때 김성우(金成雨)장군(將軍)이 이곳에 불뭇간을 두고 병기를 만들어서 적을 무찔렀다 한다. 現在(현재)는 靑川貯水池(청천저수지)로 거의 漫水(만수)되었다.

西 山 밑

「담안」남(南)쪽에 자리한 마을을「서산밑」이라고 부른다. 서산(西山)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現在(현재)는 靑川貯水池(청천저수지)로 ⅔는 漫水(만수)되었다.

書 院(서원) 말

「아래장골」서쪽에 자리한 마을을 서원(書院)말이라고 부른다. 1610年 숙종(肅宗)때 창건한 마을에 있어서 「書院(서원)말」이라고 불렀는데 한산이씨(韓山李氏)들이 주축이 되어 창건했던 서원이 現在(현재)는 靑川貯水池(청천저수지)로 漫水(만수)되어 洞內(동내)는 없어지고 花岩書院(화암서원)만 있다. 山中(산중)턱에 移築(이축)하였음.

장 골

「담안」북쪽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장골」이라고 부른다. 조선말엽(朝鮮末葉)때만해도 수백년 묶은 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어 장관을 이룬 마을이라「장골」이라 불렀다 한다. 장산리(長山里)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다.

질 골

「장골」서쪽으로 긴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골짜기를「질재」라 부르고 「질재」는 긴고개로서 주포면(周浦面) 신성리(新城里)로 넘어가는 고개다. 그 고개 아랫마을은「질골」이라고 부른다.
산골짜기에는 사기정굴(사기굽던 곳)이란 곳이 있는데 高麗時代(고려시대)의 그릇점이라고도 한다. 또 놋정굴이 있는데 이 산골짜기에서는 놋 그릇을 生産(생산)했을 것이라는데 그 흔적은 없다.
질골 뒷山이 五峰山(오봉산)(봉우리가 다섯으로 되어 있음)으로 이 山下(산하)에 將軍大地名堂(장군대지명당)이 있다 하여 봄이 되면 각지에서 地士(지사)들이 모여들기도 한다.

玉溪里(옥계리)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朝鮮末葉)엔 보령군(保寧郡) 오삼전면(吾三田面)의 지역(地域)으로 옥계(玉溪)가 되므로 옥계(玉溪)라 하였는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시궁동(柴弓洞), 정동(貞洞), 서촌(西村)과 길현리(吉峴里)의 各一部(각일부)를 병합하여 옥계리(玉溪里)라 해서 청라면(靑蘿面)에 편입(編入)되었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청라면 옥계리로 되었다.

괴 동

「수닌말」서쪽에 자리한 산(山)을 괴등(掛燈)이라고 부른다. 산(山)에 괴등형(掛燈形)의 명당(名堂)이 있다해서 괴등(掛燈)이라고 부른다.

길 마 재

서촌(西村) 북쪽으로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길마재」라고 부른다. 고개모양이 길마처럼 생겼다해서「길마재」라고 부른다. 고개 아래 마을도 고개지명(地名)따라「길마재」라고 부른다.「길마재」외(外)「길현」,「길현리」「질마재」라고도 부른다.

노루목이

「정골」서남(西南)쪽에 자리한 목을「노루목이」라고 부른다. 노루의 목처럼 생겼다해서「노루목이」라고 부른다.
玉溪(옥계) 西南(서남)쪽 山上(산상)에 岩壁(암벽)이 矗天(촉천)하여 鸞岩(난암)(부엉바위)이라 하며, 예로부터 三災(산재)와 惡病(악병)이 不入(불입)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느릅나뭇들

서촌(西村) 남쪽으로 들이 있는데 이 들을「느릅나무들」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들에 느릅나무가 있었다해서「느릅나무들」이라고 부른다.

西 村(서촌)

「정골」東北(동북)쪽에 자리한 마을을「西村(서촌)」이라고 부른다. 황룡리(용머리)의 서쪽에 마을이 있다. 옛날부터 서씨(徐氏)들이 많이 사는 마을이다.

시 궁 골

「정골」서북(西北)쪽 골짜기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시궁골」이라고 부른다.「시궁동」,「시동」이라고도 부르는데 옛날에 활을 쏘던 터가 있었다해서 「시궁골」이라 부른다. 시궁동 입구에 신랑바위와 낭자바위가 있고 예로부터 시궁골을 彎弓射敵(만궁사적)이라고 한다.

玉 溪(옥계)

정골 남쪽에 있는 마을로써 玉溪(옥계)의 絶景(절경)이다. 川壁(천벽)에 김아산이라는 옛군수가 玉溪(옥계)라 새겨 玉溪(옥계)라 부르는데 安東人(안동인) 志山(지산) 金福漢先生(김복한선생)이 暫巨(잠거)한 곳이기도 하다.

절 골

「정골」서(西)쪽으로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골짜기를「절골」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절이 있었던 절터가 있다해서「절골」이라고 부른다.

진배밋들

옥계(玉溪) 동쪽으로 들이 있는데 여기를「진배밋들」이라고 부른다. 긴 배미가 있는 들이라「긴배밋들」이라고 부르던 것이 변하여「진배밋들」이라고 부른다.

정 골 (貞洞)

옥계마을 북쪽으로 깊숙한 마을이 있는데 정골(貞洞)이라고 부른다. 내정골 외정골로 나누어 있는데 내정골에는 오서산의 정기를 받은 복호형(伏虎形)이 있어 천하의 명당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서울에서 한 선비가 내려와 자손을 번창하게 하기 위하여 자리를 잡았다고 하며 토정선생이 천하대지라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漢陽趙氏(한양조씨)가 보령에서 번창한 근원이 되는 곳이다.

옥 계 정 (玉溪亭) 터

청라면(靑蘿面) 옥계리(玉溪里)에 옥계정(玉溪亭)이라고 부르는 정자가 있었다. 옛날에 이정민(李貞敏)이 세우고 석벽(石壁)에 옥계(玉溪) 두자를 새겼는데 지금도 글씨가 남아있다.

무 이 정 (撫夷亭) 터

保寧里(보령리)에 있던 정자(亭子)다. 보령현(保寧縣)때 객관 동편(東便)에 자리해 있었다. 옛날부터 선비들의 휴식처(休息處)로 이토정(李土亭)이 말하기를 원골의 삿갓같다고 풍자한 정자인데 성종(成宗)때에 현감(縣監) 朴連孫(박연손)에 중수하고 마침 이곳을 지나던 관찰사(觀察使) 정미수(鄭眉壽)가 무이정(撫夷亭)이라고 부르게 하였다 하나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黃龍里(황룡리)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朝鮮末葉)엔 보령군(保寧郡) 오삼전면(吾三田面)의 지역(地域)으로서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황곡리(黃谷里), 사가리(四佳里)상룡리(上龍里), 석우동(石隅洞), 광암리(廣岩里), 송당리(松堂里), 하룡리(下龍里), 중리(中里) 各 一部(각일부)를 병합하여 황곡(黃谷)과 상룡(上龍)의 이름을 따서 황룡리(黃龍里)라 하여 청라면(靑蘿面)에 편입(編入)되었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청라면 황룡리로 되었다.

높티서낭당

「소당이」이에서「돌모루」로 넘어가는 고개를「높티」라고 부른다. 높은 고개라는 뜻에서「높티」라고 부른다.「높티」에 서낭당이 있는데 천신(天神)과 산신(山神)을 모시고 액운을 없애며 풍년(豊年)을 비는 당(堂)이다. 烏棲山(오서산) 豊項谷前(풍항곡전)에 불랑굴인데 불랑굴이 아니고 佛糧(불량)굴이다.

느 리 실

「아래용머리」동남쪽 골짜기에 자리한 마을을「느리실」이라고 부른다.「누루실」「황곡」이라고도 부르는 마을이다. 마을이 황색(黃色)이란 뜻에서 인영된 이름이다.

돌 모 루

사가리(四佳里) 북쪽에 자리한 마을을「돌모루」라고 부른다. 「석우」라고도 부르는
데 모롱이에 돌이 많다해서「돌모루」「석우」라고 부른다.

소 당 이

「돌모루」동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소당이」라고 부른다. 마을이 소나무로 우거져 마치 그안에 자리한 아늑한 당과 같다해서 「소당이」「송당」이라고 부른다.

四 佳 里(사가리)

「소댕이」 서남(西南)쪽에 자리한 마을을 사가리(四佳里)라고 부른다. 마을에 네 갈래의 길이 있다해서 사가리(四佳里)라고 부른다. 마을앞에 펼쳐진 들은「사가리들」이라고 부른다. 배 띄운 형상이 化(화)해서 돛대 바위, 배바위가 현재도 있다.

너 분 들

사가리(四佳里)동쪽 들가운데 자리한 마을을「너분들」이라고 부른다. 「속벌」「광암」이라고도 부르는데 마을에 넓은 바위가 있다해서 「속벌」「광암」「너분들」이라고 부른다.

용 둠 벙

「아래용머리」남쪽으로 소(沼)가 있는데 이 소(沼)를「용둠벙」이라고 부른다. 둠벙에 용(龍)이 살고 있다하여 한해가 심할때는 여기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낸다.

용 머 리

항룡리(黃龍里)에서 으뜸가는 마을이다. 마을지형(地形)이 용(龍)의 머리처럼 생겼다해서「용머리」라 부른다.「용머리」아랫마을은 「아래용머리」라고 부른다. 또한「용머리」위쪽으로 자리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은「위용머리」,상룡(上龍),상룡리(上龍里)라고 부른다. 용둠벙위에 산형이 龍頭(용두)와 如何(여하) 험준하여 龍頭(용두)라고 한다.

長峴里(장현리)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朝鮮末葉)엔 보령군(保寧郡) 오삼전면(吾三田面)의 지역(地域)인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삼거리(三巨里), 상장전리(上長田里), 명대리(鳴垈里), 위현리(渭峴里), 하장전리(下長田里)의 各一部(각일부)를 병합하여 장전(長田)과 위현(渭峴)의 이름을 따서 장현리(長峴里)라 하여 청라면(靑蘿面)에 편입(編入)되었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로 되었다.

공 뜸

「아래장밭」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공뜸」이라고 부른다. 마을이 생겼을 때 공씨(孔氏)들이 많이 살았다해서 「공뜸」이라고 부른다.

三 巨 里(삼거리)

「위장밭」서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삼거리(三巨里)라고 부른다. 세갈래의 큰 길이 있다해서 삼거리(三巨里)라 부르는 마을이다. 지금으로부터 40년전만 하여도 주막(酒幕)이 있어서 사람들이 흥청거리던 마을이다.

구 래 (烏棲山內)
「명대」북쪽에 자리한 굴을「구래」라고 부른다. 굴이 방처럼 생겼는데 아홉사람이 들어갈 만한 넓이의 굴이라 하여「구래」라고 부른다.

김나는 바위

삼거리(三巨里) 북(北)쪽 오서산(烏棲山) 남(南)쪽 기슭에 자리한 바위를 「김나는 바위」라고 부른다. 바위에서 김이 난다해서 「김나는 바위」라고 부른다.

노 적 봉

「아래장밭」남쪽으로 산이있는데 이 산(山)을 「노적봉」이라고 부른다. 산(山)모양이 노적가리처럼 생겼다해서「노적봉」이라고 부른다.

당 산 밑

산제당(山祭堂)아래에 마을이 있다해서「당산밑」이라고 부른다. 처음은「당산밑」이라고 부르던 것이 변해서「당산밑」이라고 부른다. 「아래장밭」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도깨비보

「아래장밭」남쪽으로 보(堡)가 있는데 여기를「도깨비보」라고 부른다. 날이 궂을 때나 비가 온 후는 도깨비불이 있었으며 도깨비가 있는 보(堡)라 하여「도깨비보(堡)」라고 부른다.

산 숫 골

「아래장밭」남동(南東)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산숫골」이라고 부른다. 마을 산과 물이 좋아서 신선객이 놀 수 있는 마을이라 「산숫골」이라 부른다.

새 논 들

「솔안말」북쪽에 있는 들을「새논들」이라고 부른다. 들에 새로 논을 일구었다해서「새논들」이라고 부르는 들이다.

石 峰(석봉)

「솟점」동북(東北)쪽으로 자리한 산을 석봉(石峰)이라고 부른다. 산꼭대기에 괴석(怪石)이 있다해서 석봉(石峰)이라 부른다.

솔 안 말

「아래장밭」 동(東)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솔안말」이라고 부른다. 솔이 우거진 숲 안으로 마을이 자리해 있었다해서 「솔안말」이라고 부른다.

솟 점

「뒤퉁굴」동(東)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솟점」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솟
을 만드는 집이 자리해 있던 마을이라 「솟점」이라고 부른다.

長 田(장전)

장현리(長峴里)에 자리한 마을이다. 밭이 길고 아득하게 있는 마을이라 하여「장밭」이라고 부른다. 장밭(長田)에는 아래장밭이 장현리(長峴里)에서 중심되는 곳에 있으며 또한 위장밭은「아래장밭」북쪽에 있다. 「위장밭」은 상전리(上田里), 상장전(上長田), 상장전리(上長田里)라고도 부르며「아래장밭」은 하장리(下長里), 하장전(下長田), 하장전리(下長田里)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청라수리조합 創立(창립)에 큰 공을 세운 김창진선생이 사셨다.

약 현

「아래장밭」서(西)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약현」이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약초(藥草)를 많이 재배하던 곳이라 하여 약현(藥峴)이라고 부른다.

옻 샘

「위장밭」과「鳴垈(명대)」사이에 있는 샘을「옻샘」이라고 부른다. 물이 매우 차서 옻오른데 목욕(沐浴)을 하면 신효하다 함는 샘이 있다.

雲 垈(운대)

옛날에 마을에 글을 읽을줄 아는 사람이 한 사람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글을 읽을 줄 몰랐으나 그는 글을 읽는 사람이라 마을에선 그를 선비라고 불렀다.

그가 과거시험을 보러 간다고 한양으로 떠났다. 과거를 보러 집을 떠날 때 마을 사람들은 그를 크게 환송해 줬었다. 헌데 한양으로 올라간 그는 삼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그래서 마을에서나 그의 부모들은 울상이였는데 하루는 삼년만에 편지가 그로부터 왔다. 편지는 왔는데 읽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편지를 들고 거리에서 서 있었다. 때마침 선비 한사람이 말을 타고 지나갔다. 그에게 편지 좀 읽어 달라고 하였더니 사실은 이 사람도 옷차림만 선비이지 글을 읽을줄 모름으로 편지를 들더니 이리보고 저리보고 하다가 「반갑지 않은 편지」올시다 하고 떠나갔다. 마침 우수고개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았으므로 그날부터 편지도 못읽는 주제에 무슨 선비야 하고 웃으며 그후에도 가끔 그 이야기를 꺼내어 웃었고 선비가 한양으로 떠난 마을사람들은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울면서 살았다하여「울틔」라 부르고「우수고개」사람들은 걱정할 것 없다고 웃으며 지냈다 해서「우수고개」라고 부른다 한다.

그후에도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였다는 소식도 없고 통 소식이 없었다 한다.

「위장밭」북(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운대(雲垈)라고 부른다. 구름에 가끔 가리는 자리에 마을이 생겨서 명당(明堂)이 자리한 곳이라 한다. 「울틔」라고도 부르며「명대」,「명대리」라고도 부른다.

위수고개

운대(雲垈) 북(北)쪽으로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위수고개」라고 부른다. 장현리(長峴里)에서 청양군(靑陽郡) 화성면(化城面) 화암리로 넘어가는 고개다. 고개아래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도 고개 지명(地名)따라 「위수고개」라고 부른다. 위현(渭峴)이라고도 부른다.

육소나무

「위수고개」동(東)쪽으로 소나무가 있는데 이 소나무를「육소나무」라고 부른다. 소나무 나무가지가 소나무 밑둥에서 나와서 많은 가지가 기이하게 생긴 소나무다.

장승백이 서낭당

「삼거리」서쪽으로 서낭당(城徨堂)이 있는데 이 서낭당(城徨堂)을 장승백이 서낭당이라고 부른다. 산신(山神)과 천신(天神)을 받느는 「서낭당」인데 근처에 장승이 박혀있다해서「장승백이서낭당」이라고 부른다.

점 터

「위수고개」북쪽에 자리한 마을을「점터」라고 부른다. 옛날에 옹기점이 있어서 많은 장수꾼들이 드나들던 곳이다. 옹기점이 있었던 마을이라「점터」라고 부른다.

통 샘

삼거리(三巨里)마을 가운데에 샘이 있는데, 이 샘을「통샘」이라고 부른다. 샘 둘레를 통으로 짠 샘이다.

新山里(신산리)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朝鮮末葉)엔 보령군(保寧郡) 오삼전면(吾三田面)의 지역(地域)으로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상건천리(上乾川里), 하건천리(下乾川里), 박산리(朴山里), 신평리(新坪里)와 書堂굴, 구렁목, 알매굴의 各一部(각일부)를 병합하여 신평(新坪)과 밥산(食積峯) (박산)의 이름을 따서 신산리(新山里)라 하여 청라면(靑蘿面)에 편입(編入)되었다.`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청라면 신산리로 되었다.

乾 川(건천)

신산리(新山里)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개울에 돌이 많아서 물이 속으로 흐르므로 겉은 늘 말리있다해서 냇물 근처에 자리한 마을도 건천(乾川)이라고 부른다.

구 룡 목

「새말」남(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구룡목」이라고 부른다. 마을을 아홉 용이 목을 지키는 풍수(風水)적 해석에 따라 「구룡목」이라고 부른다.

덕 너 머

「박살미」남(南)쪽 언덕너머에 자리한 마을을「덕너머」라고 부른다. 언덕너머에 마을이 자리해 있다해서「덕너머」라 부른다.

상 건 천

건천(乾川) 마을 뒤에 자리한 마을을「상건천」「위건천」이라고 부른다. 「건천」마을 뒤 쪽에 자리해 있으나, 위의 위치가 됨으로 「상건천」「위건천」이라고 부른다.

아래건천

건천(乾川) 마을 아랫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정 자 말

「아래건천」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정자말」이라고 부른다. 마을에 정자나무가 있는 마을이라「정자말」이라고 부른다.

새 말

건천(乾川) 동(東)쪽으로 새로 마을이 생겼는데 이 마을을「새말」이라고 부른다. 신촌(新村)이라고도 부르는데 마을이 생겼다 해서 「새말」「新村(신촌)」이라고도 부른다.

奄峴里(음현리)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朝鮮末葉)엔 보령군(保寧郡) 오삼전면(吾三田面)의 지역(地域)으로서 산이 사방(四方)으로 둘러싸고 고개가 많으므로 「음고개」또는「음현(奄峴)」이라 하였는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신대리를 병합하여 음현리(奄峴里)라 해서 청라면(靑蘿面)에 편입(編入)되었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청라면 음현리로 되었다.
감나뭇골
「네거리」북쪽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감나뭇골」이라고 부른다. 마을에 감나무가 많아서 옛날부터 감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네 거 리

음현리(奄峴里)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이다. 「감나뭇골」남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네갈래의 길이있다해서「네거리」「사거리」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四 街 里(사가리)

이 네거리에 居住(거주)하는 平山申氏(평산신씨)라는 當者(당자)가 있었는데 當者(당자)집에 僧(승)이와서 시주를 달라고 要求(요구)함에 그 집 종 한사람이 동냥을 가지고 와서 내 손을 좀 고쳐 달라고 하니 그 僧(승)말이 그 손이 왜 그러냐 하니 늘 술을 걸러 손이 마를 새가 없어 이렇다고 하니 그것 고치기 쉽다고 하며 이 當者(당자)집에서 보이는 돛대 바위를 부시고 뒷산맥을 끊으라고 함에 그대로 했더니 그 當者(당자)가 裏邊(이변)하여 술을 안거르니 自然(자연) 손은 낫고 申氏家(신씨가)의 子孫(자손)은 많이 살고 있다.

뒷 골

「네거리」뒷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뒷골」이라고 부른다. 마을 뒤에 자리하였으므로 「뒷골」또는 후동(後洞)이라고도 부른다.

선 윳 골

「새터」동(東)쪽으로 골짜기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선윷골」또는 선유동(仙遊洞)이라고 부른다. 골이 그윽하고 경치가 좋아서 신선이 놀았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마을이다. 음현리 入口(인구)에 仙遊洞(선유동)이 있는데 山勢(산세)가 좋아서 仙女(선녀)들이 놀고있다하여 仙遊洞(선유동)이라 한다. 그 자리에 仙人舞袖名堂(선인무수명당)이 있다하고 하여 名士(명사)들이 자주 드나든다.

奄 峴(음현)

음현리(奄峴里)에 자리한 마을이다. 「음고개」「음현」이라고 부르는데 산(山)이 사방으로 둘러싸고 고개가 많으므로 「음고개」「음현」이라 부른다.

안 터

「윗말」안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안말」이라고 부른다. 마을이 있고 그 마을 안쪽으로 자리하였다 해서「안말」이라고 부른다.

톳 골

「안터」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톳골」이라고 부른다. 마을이 튀어나왔으며 어디를 보나 산중의 마을로는 정경(情景)이 뛰어나다 해서「톳골」이라 부른다.
음현리 入口(인구)에 仙遊洞(선유동)이 있는데 山勢(산세)가 좋아서 仙女(선녀)들이 놀고있다하여 仙遊洞(선유동)이라 한다. 그 자리에 仙人舞袖名堂(선인무수명당)이 있다하고 하여 名士(명사)들이 자주 드나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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